'3년 징계' 시련, 실력으로 넘었다... 돌아온 이해인의 증명
20일(한국시각) 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스케이팅 아레나. 마지막 스핀이 멈추고 음악이 끝나자, 이해인(21·고려대)은 그대로 차가운 은반 위에 등을 대고 드러누웠다. 관중석에서는 탄성과 박수가 쏟아졌지만, 그는 잠시 눈을 감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것은 단순한 체력 소진이 아니었다. 지난 2년, 자신을 짓눌러왔던 거대한 억울함과 시련의 무게를 비로소 내려놓는 ‘해방의 의식’이었다.‘김연아 키즈’의 선두 주자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천재, 그리고 다시 올림픽 무대까지. 이해인이 써 내려간 4분여의 프리스케이팅은 단순한 경기가 아니라, 한 편의 생존였다.
이해인은 이날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기술점수(TES) 74.15점, 예술점수(PCS) 66.34점을 합쳐 140.49점을 받았다. 이틀 전 쇼트프로그램(70.07점)을 더한 총점은 210.56점. 최종 순위는 8위였지만, 내용은 금메달감이었다. 쇼트와 프리 모두 올 시즌 자신의 최고 점수를 갈아치웠고, 단 하나의 실수도 없는 ‘클린 연기’를 펼쳤다.

경기 직후 믹스트존에서 만난 이해인의 첫마디는 “살았다”였다. 그는 “빙판에 누운 건 안도감 때문이었다. 내가 여기까지 왔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긴장이 확 풀렸다”며 웃었다. 생애 첫 올림픽이라는 중압감보다, 다시 스케이트를 신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이겨낸 자의 여유가 묻어났다.
이해인의 올림픽 여정은 가시밭길 그 자체였다. 2018년 주니어 그랑프리 메달을 따며 혜성처럼 등장했지만, 올림픽의 문턱은 높았다. 2022년 베이징 대회 때는 본인이 출전권 2장을 따오고도 정작 선발전 난조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진짜 위기는 2024년에 찾아왔다. 국외 전지훈련 도중 불거진 음주 및 후배 성추행 의혹. 대한빙상경기연맹은 그에게 ‘자격 정지 3년’이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사실상 선수 생명 사형 선고였다. 그러나 이해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법정 싸움을 통해 후배와 연인 관계였음을 입증했고, 징계 효력 정지 가처분 인용과 무효 판결을 이끌어냈다.
“다시는 빙판에 서지 못할 줄 알았다”던 그는, 복귀 후 보란 듯이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하며 자신의 무죄를 실력으로 증명했다.
우여곡절 끝에 선 꿈의 무대에서 이해인은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 그는 “빙판 위는 오직 나만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즐겼다”고 했다. 억울함에 눈물 흘리던 소녀는 이제 “엄마랑 젤라토를 먹으러 가고 싶다”며 해맑게 웃는 스물한 살 청춘으로 돌아왔다.

그는 4년 뒤를 기약했다. “올림픽이 당장 목표는 아니지만, 피겨를 오래오래 하고 싶다. 건강하게 하루하루 노력하다 보면 또 기회가 오지 않을까.”
밀라노의 빙판은 차가웠지만, 그 위에 누운 이해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했다. 시련은 그를 무너뜨리지 못했고, 오히려 더 단단한 ‘강철 나비’로 만들었다. 이해인의 ‘진짜 피겨’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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