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튀기는 반도체 1위 쟁탈전..삼성은 이미 준비 끝
전 세계 인공지능(AI) 산업의 심장부라 불리는 엔비디아를 향한 구애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인공지능 반도체의 핵심 부품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을 두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그리고 미국 마이크론까지 가세한 반도체 빅3의 자존심 대결이 가히 전쟁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특히 차세대 제품인 6세대 HBM4 공급권을 선점하기 위해 삼성전자가 전날 기습적인 양산 출하 발표를 던지면서 주도권 싸움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현지 시간 13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경쟁사들을 따돌리고 HBM4 양산 출하를 가장 먼저 공식화했다. 이는 당초 시장이 예상했던 일정보다 약 일주일가량 앞당겨진 수치다. 삼성전자가 이토록 서두른 이유는 명확하다. SK하이닉스가 그간 HBM 시장에서 쌓아온 독점적 지위를 흔들고, 최근 공급망 탈락 루머에 휩싸였던 마이크론의 추격을 완전히 뿌리치겠다는 전략이다. 삼성전자는 이번 발표를 통해 JEDEC(국제반도체표준화기구) 기준을 뛰어넘는 압도적인 성능과 안정적인 수율을 확보했다며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번에 출하되는 HBM4는 엔비디아가 올해 야심 차게 선보일 차세대 AI 가속기 루빈(Rubin)에 탑재될 핵심 메모리다. 전작과 비교했을 때 데이터가 오가는 통로인 입출력단자(I/O) 수를 2048개로 두 배 늘려 데이터 전송 속도를 혁신적으로 끌어올린 것이 특징이다. 삼성전자는 업계 최고 수준인 11.7Gbps의 동작 속도를 구현하며 전작 대비 약 1.22배 향상된 성능을 증명했다. 특히 경쟁사보다 한 세대 앞선 1c(6세대 10나노급) D램을 적용하고 베이스 다이에 4나노미터 공정을 도입하는 등 기술적 우위를 점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물론 경쟁사들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SK하이닉스는 지난달 실적 발표를 통해 이미 HBM3E와 HBM4를 동시에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업계 유일의 기업임을 강조하며 고객사가 요청한 물량을 현재 양산 중이라고 맞불을 놨다. 마이크론 역시 최근 불거진 공급망 탈락설을 정면 반박하며 가이드라인보다 한 분기 앞당겨 대량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메모리 3사 모두가 이달 내 엔비디아를 향해 제품을 보내는 리스크 양산 단계에 진입한 셈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용어가 바로 리스크 양산이다. 보통의 양산이 모든 품질 테스트를 통과하고 정식 주문을 받은 뒤 시작되는 것과 달리, 리스크 양산은 고객사의 최종 인증이 완료되기 전부터 웨이퍼를 선제적으로 투입하는 방식이다. HBM은 제작 기간만 4개월이 넘게 걸리기 때문에 엔비디아의 신제품 출시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는 메모리 업체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미리 물량을 찍어낼 수밖에 없다. 업계 고위 관계자는 엔비디아의 공식 퀄테스트 종료 시점은 올 1분기 말이 될 것이며, 실질적인 물량 확대는 하반기나 되어야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이번 HBM4 전쟁의 진짜 관전 포인트는 기술력 그 너머에 있다. 바로 갑 중의 갑 엔비디아의 수급 전략이다. 엔비디아 입장에서는 HBM4의 성능도 중요하지만, 전 세계적인 메모리 부족 현상 속에서 최신 AI 가속기를 제때 시장에 내놓는 것이 더 큰 과제다.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물량이 부족하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현재 삼성전자는 1c D램의 수율이 60% 내외로 추산되어 공급량을 단기간에 급격히 늘리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반면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로부터 가장 많은 물량을 배정받았으나, 초기에 요구된 11.7Gbps급 성능을 완벽히 구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처럼 기술력과 생산량 사이의 미묘한 불일치가 발생하면서 엔비디아가 결국 성능 조건을 소폭 완화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업계 전문가들은 엔비디아가 최상위 제품 외에도 10.6Gbps급의 차상위 제품을 함께 수급하는 이른바 하이브리드 전략을 취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되면 메모리 3사 모두 공급 부담이 줄어들어 엔비디아는 필요한 물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작년에는 누가 더 빠른 제품을 만드느냐의 싸움이었다면, 올해 HBM4 전쟁은 누가 더 많은 물량을 안정적으로, 그리고 낮은 발열과 전력 소모로 공급하느냐의 싸움으로 변모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반도체 자존심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전 세계 AI 시장의 판도를 좌우할 HBM4 시장을 놓고 벌이는 이번 승부는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고 정교하다. 하반기 본격적인 물량 공세가 시작될 때 누가 웃게 될지, 그리고 엔비디아의 선택이 글로벌 반도체 지형도를 어떻게 바꿔놓을지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확실한 것은 이제 반도체는 단순히 만드는 기술을 넘어, 고객사의 전략에 얼마나 민첩하게 대응하느냐가 승패를 가르는 시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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