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1939∼2008)의 단편 ‘서편제’가 북장단과 성음을 전면에 내세운 소리극 ‘서편제; 디 오리지널(The Original)’로 다시 태어난다. 국립정동극장 개관 30주년 기념작으로 마련된 이번 공연은 10월 17일 시작해 11월 9일까지 서울 중구 국립정동극장에서 관객을 만난다. 

 

각색과 연출을 맡은 고선웅 극공작소 마방진 예술감독은 “본질을 훼손하지 않겠다”는 원칙 아래 원작의 결을 최대한 보존했다. 그래서 등장인물의 호칭도 소설 그대로 ‘아비’, ‘소녀’, ‘사내’로 남겼고, 인물의 운명을 뒤흔드는 선택—아비가 딸의 눈을 고의로 멀게 하는 설정—역시 건드리지 않았다. 그는 “현대의 잣대로 섣불리 정리하기보다 문학이 허용하는 영역을 무대에서 정직하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무대는 ‘길’의 은유를 전면화한다. 회전하는 대형 원형무대가 설치되어 배우들이 끊임없이 걷는다. 남도의 소리길, 인생의 순환, 만남과 이별이 교차하는 장면들이 회전과 보폭에 겹쳐지며, 상처가 축적되고 해소되는 심리적 여정이 공간적으로 체감된다. 음악 구성은 원작의 정서를 바탕으로 총 22곡을 엄선하되 극 흐름에 맞게 재배열했다. 특히 아비가 눈먼 소녀를 남겨두고 세상을 뜨는 장면에서 ‘춘향가’의 ‘이별가’를 배치해 부녀의 비극과 염원을 압축한다. 고선웅은 “춘향과 이도령의 이별을 부녀 관계에 투영하면 소리가 가진 비의(悲意)와 간절함이 극대화된다”고 설명했다.

 

배우진의 조합도 기대를 모은다. 소녀 역에는 박지현과 김우정이 더블 캐스팅됐다. 서울대 국악과 재학 중인 박지현은 2022년 전국 창작판소리경연대회 최우수상 수상자로, 영화 ‘서편제’의 오정혜를 떠올리게 하는 음색과 외모로 몰입감을 높인다. 그는 “최고의 창작진, 선배들과 한 무대에 선 것이 영광”이라며 “끝까지 집중력을 놓치지 않겠다”고 각오를 전했다. 아비 역은 남원시립국악단 악장 임현빈과 국악밴드 이날치의 안이호가 맡아 각기 다른 결의 장단과 서사를 선보인다. 국립창극단 창악부의 김우정은 노련한 성음으로 소녀의 내면을 입체화할 예정이다.

 

국립정동극장은 이번 작품을 통해 ‘원작의 서사’와 ‘무대의 소리’를 정면 충돌시키기보다 겹쳐 듣는 경험을 제안한다. 극적 대사보다 북과 소리, 호흡과 보폭이 이야기를 이끌고, 회전무대 위 끝없는 걸음이 관객의 청각과 시선을 끌어당긴다. 

 

단 하루의 이벤트가 아닌, 30주년의 의미를 새기는 장기 기념공연으로 기획된 만큼, 한국 문학의 정수와 판소리의 본령을 가장 ‘오리지널’하게 마주할 시간이다. 연말 정동의 밤, 무대 위에 깃든 남도의 바람과 한(恨)이 다시 한 번 객석을 울릴 채비를 마쳤다.